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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전시&공연 리뷰
위대한 낙서그래피티에 관한 짧은 개관
박수인 칼럼니스트  |  tndls12101210@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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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3.31  08: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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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티스트매거진=박수인]그래피티는 벽이나 그 밖의 화면에 낙서처럼 긁거나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 그리는 그림이다. 빈민가에 주로 그려져 있는 낙서로, 외관을 해치는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어왔다. 그러다 추상주의와 팝아트의 흐름과 맞아떨어지면서 콘브래드(convread)와 쿨 얼(cool earl)이라는 서명을 남긴 작자미상에 의해 그래피티가 그래피티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래피티는 여러모로 미술의 개념을 확장시키는데 앞장 서 왔다.

 

동굴로부터의 해방

인류의 역사는 소(牛)로 시작한다. 세계사, 예술사, 영화사 등 사(史)가 붙은 책의 첫 장은 알타미라 동굴에 새겨진 달리는 소다. 인류 최초의 미술은 앞으로 그림이 마주하게 될 운명을 예고라도 하듯 동굴 깊숙이 숨어있었다. 그로부터 17,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림은 어둡고 컴컴한 동굴 속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보러와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지창조]도, 테이트 미술관의 [우는 여인]도 위대한 그림이라는 칭호를 얻었지만 사실 알타미라 동굴의 소와 다를 바 없는 처지이다. 따져보면 더 안쓰러운 처지다. 이름표, 온갖 설명, 팜플렛과 함께 액자에 갇혀있다. 간혹 가다 울거나 웃는 사람은 있지만 장바구니를 이고 집에 가는 사람도 없고 줄넘기 하는 사람도 없다.

그래피티는 이 동굴 속에서 뛰쳐나와 사람들과 마주한다. 경계도 없다. 보존에 대한 강박도 없어 그림 자체가 개방적이다. 사람들이 만져볼 수도 있고 직접 그림을 고쳐나갈 수도 있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그림 앞에 멈춰 우러러 보는 것이 아니라 . 권위로 부터 해방하여 관객과 수평적인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감상의 확대

그래피티는 예술의 감상 범위를 확장시켰다. 그래피티는 보통 익명의 화가에 의해 갑자기 그려진다. 하룻밤 사이에 내 집 벽에도 그림이 그려질 수 있다. 그래피티가 예술로 인정받는 지금(까지)도, 서울 지하철에 누군가가 그렸던 그림이 메인 뉴스에 나올 만큼 사회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림 자체에 감탄하기도 하지만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용기에 감탄한다. 제임스 본드가 미션을 완수했을 때의 짜릿함이 그래피티에서는 느껴진다. 그래피티를 그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타일, 스프레이, 스티커, 스텐실 등이 있는데 그 중에도 스티커와 스텐실로는 거대한 그림을 그리는 것이 가능하다. 어두웠던 밤 사이에 이렇게 커다란 그림이 그려질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다. 어디에 그려져 있느냐도 재미있는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차 신호등 뒤편에도 그려지고 시청 벽, 심지어는 강 방파제 중간에도 그려진다. 기상천외한 곳에 그려진 그림들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래피티에 관한 짧은 개관2

그래피티가 전시관으로 다시 들어온 것은 장 미셸 바스키아와 키스 해링이 큰 인기를 끌면서이다. 해방을 외치며 전시관을 뛰쳐나온 그래피티는 다시 동굴로 회귀하였다. 관객과 그림 사이의 자유로운 왕래는 끊기고 다시 경계선으로 나뉘었다. 하지만 전시의 기획도 이 그래피티가 찾았던 자유를 보여주기 위해 많은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던 <그래피티 : 위대한 낙서>전을 예로 들어보자면, 관의 주제가 바뀔 때 도입부에 설명 표지판을 제외하고는 작품 옆의 이름표가 없다. 또 사진과 영상과 함께 그래피티 작품이 그려진 곳이 어땠는지에 대한 환경도 잘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작가를 직접 초대하여 전시관 한 쪽 벽에 작품을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원론적인 지적을 해보고자 한다. 그래피티 작품이 전시관 안으로 들어왔다면, 그래피티는 더 이상 그래피티가 아니다. 사람들은 화가의 익명성, 질서에 발끈하는 반항심에 열광하며 그래피티를 거리의 예술로 인정했다. 하지만 갤러리에서 마주하는 그래피티 작품에는 그러한 의도는 찾아볼 수 없다. 은밀히 말하자면 기존 동굴에 갇혀있던 그림과 다를 바가 없다.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이 담긴 캔버스와 전시관 속 그래피티 작품이 다른 점이 무엇인가. 그래피티라는 단어의 재정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혹은 그래피티의 전시는 전시관 밖에서 이루어져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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